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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셋 담론 - ② "눈썹도 코르셋일까?" 코르셋의 범주와 탈코르셋 운동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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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셋 담론 - ② "눈썹도 코르셋일까?" 코르셋의 범주와 탈코르셋 운동

botho 2019. 7. 15.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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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러제트 여성들을 비하하기 위해 만들어진 포스터를 보자. 무엇이 떠오르는가?

나는 '마녀'의 이미지가 가장 먼저 생각난다.

혼자 살고, 코는 양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모양의 메부리, 늙고 추한 모습, 그리고 결혼한 여성들에게 향한 질투심, 분노로 가득차 보이는 표정 등등.

또, '페미니스트들은 전부 쿵쾅이임'이라 생각하는 몇몇 명예 남성들과 남성들이 떠오를 것이다.

우리야 당연히 이것들은 전부 사실이 아님을 알고있지만, 마녀사냥이 이루어지던 17~18세기의 영주민들, 20세기의 ^정상적인 가족 범주^에 들어가있는 남성과 여성 그리고 21세기 시민들은 이런 이미지를 진짜 '마녀'와 '서프러제트', '페미니스트'의 모습이라고 믿는다.

앞서 1부에서 느꼈듯, 이런 만들어진 이미지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의 다양한 교차에 의해 형성된다.

토토가를 비롯해 90년대 향수를 이르키도록 수 많은 콘텐츠가 2015년 이후로 쏟아졌다. 그 후로 어떤 변화가 생겼는가? 

90년대 복고풍의 패션이 유행되지 않았던가? 

만들어지는 '이미지'의 위험성은 정말 어마무시하다.

이 만들어진 이미지는 백래쉬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앞서 1탄에서 코르셋의 시작은 '콤플렉스 증후근'이라고 했다. 미디어에서 만들어 낸 미적 기준과 그로 인한 여성들의 콤플렉스 증후근을 살펴보도록 하자.

1. 성형

성형이야 말로 콤플렉스 증후근의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부류이다.

1차 세계 대전 당시, 총상으로 인해 뼈가 부서지고, 독으로 피부가 녹아내린 병사들을 치유하기 위해 비약적으로 성형외과가 발전되었다. 

그러나 세계대전 이후, 성형 수술이 필요해진 환자들이 적어지기 시작했다. 또한 전체 의료의 맥락 속에 단순한 미용 수술이 아닌 전문과목을 확립하려는 필요성 속에서 성형외과 자체의 철학적 정당성의 딜레마와 마주하게 되었다.

이런 궁지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외과 의사들은 새로운 심리학인 '열등 콤플렉스'를 통해 자신의 전문 과목의 정당성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 열등감 콤플렉스은 사회적, 경제적 성공의 기회를 위헙하는 열등감을 유발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신체성 속성을 의미한다.

뭉툭하고 돌출된 코 끝, 주먹코, 늘어진 유방, 눈가, 턱, 목의 주름 등등,, 열등감 콤플렉스로 인하여 모든 것을 팔 수 있게 되었다.

열등 콤플렉스에 의한 정신적 번민을 치료하여 정신적 장애를 제거하며 자존감을 고양시킬 수 있다며 의학적으로 필요한 기술임을 정당화 하였다.

또한, 1930년 세계 대공황 시기에 미국 사회에선 성형 수술이 대중화를 이뤘다.

이렇게 된 맥락을 파해치자면 이 시기 성형 수술을 받은 사람들은 대게 40대 이상의 백인 중년 여성들로서, 사회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직장 여성들이었다.

그 당시 전쟁 동안 남성의 빈자리를 채웠던 여성들은 전후에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라는 사회적 압력이 존재하였고, 여성의 노화는 곧 경제적 문제로 치환되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여성 또한 사회에 진출하며 사회 경쟁이 치열해지며 외모가 불가피한 변수로 부상되었다.

여기서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에게 압박되어져 가는 외모 경쟁은 상대적으로 남성보다 극렬하게 나타날 수 밖에 없었다.

2. 화장

 

대한민국에서 남성 화장품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시점을 아는가? 그것은 바로 1997년 IMF 경제 위기 이후였다.

이렇듯 현대 사회에 들어서면서 생존을 위한 투쟁이 새로운 정점에 오르면서 외모를 포함 모든 사용 가능한 자원을 획득하려는 노력이 커져가고 있다.

폴란드의 사회학자 '바우만'에 의하면 소비한다는 것은 그 사회의 성원권을 투자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성원권이란 소비자 사회에서 '판매 가능성'을 의미한다.

사회는 지속적으로 사회인들로부터 시장의 요구에 맞는 자질을 획득하거나 이미 가지고 있는 자질들을 수요를 계속해서 창출하여 스스로를 팔 만한 상품으로 만들도록 만든다.

이로 인해 꾸미지 않은, 교정되지 않은, 처리되지 않은 몸은 상품이 되지 못한, 온전한 성원권을 갖지 못한 실패한 몸으로 간주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성원권'은 여성과 남성에게 같은 부담감을 지내게 할까?

답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앞서 1탄에서 코르셋은 '산업화 이후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에게도 사회 진출이 불가피해졌지만, 여성은 남성보다 덜 된 존재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가해지는 억압' 이라고 하였다.

맞다. 사회는 알게 모르게 여성에게 남성과 다른 수 많은 억압을 코르셋을 통해 세뇌시켜왔다.

그 중 하나가 화장이다. 

많은 사람들이 틴트의 기원은 성 노동 여성들이 유두를 핑크빛으로 보이기 위해 바르기 시작한 것이라고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이 사실이냐 그렇지 않냐에 대한 답은 나도 모르지만 화장은 'paint'라 불리며 확실히 성매매와 연극에서만 사용되어 왔다.

화장은 정숙하지 못함을 의미했다.

그러나 1920년대, 여성의 사회 진출이 불가피해지면서 화장은 'makeup'이라는 용어와 함께 대중화되기 시작했고 오늘날은 대중화를 넘어 스타일과 개성, 자기표현의 일부로 여겨지고 있다.

이는 여성이 '공적 영역으로 진출'했음을 의미한다.

이전의 여성들의 공적 영역은 성매매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공적의 의미는 모든 남성들의 공유를 의미 했다.

이 맥락에서 무엇이 보이는가? 

처음부터 여성의 공적 영역 진출의 자격은 남성과 달랐음을 의미한다.

코르셋 담론 중에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어떤 기준으로 무엇은 코르셋이고 코르셋이 아닐까?'라는 질문이라고 생각된다.

피부 화장과 눈썹까지는 코르셋이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아니, 여성에게 피부화장과 눈썹은 코르셋이다. 그러나 남성들에게 이것은 코르셋이 아니다.

남성에게 있어 피부화장과 눈썹은 자기관리이며, 심하면 독특한 사람, 혹은 동성애자가 아니냐는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여성에게 있어 피부화장과 눈썹은 사회에 나가기 위한 '필수'이다.

사회에서 피부화장과 눈썹을 다듬지 않은 여성은 사회 진출에 좌절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이런 것이 단순히 여성에게 상대적으로 꾸밈노동을 덜 강요된다고 코르셋이 아닐 수가 있을까.

이렇듯 코르셋의 유무는 어떤 맥락에 따라 교차적으로 코르셋이 될 수도, 코르셋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어떠한 화장은 여성에게 있어서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상업적으로 분명한 코르셋이다.

미디어에서 세뇌 시키는 화장은 결코 자기만족이 될 수도, 자기 표현이 될 수 없다.

(눈썹 다듬기는 자기관리의 범주에 들어가있지만 눈썹 다듬기를 하는 남성에게는 +가 되지만 눈썹 다듬기가 되어있는 여성은 Zero이며 눈썹이 다듬어 지지 않은 여성은 -가 되는 사회 자체가 성차별적인 사회인 것이다.

굳이 -를 가진 사람이 되자는 것이 아니라 눈썹이 왜 여성에겐 코르셋인지에 대한 맥락을 같이 알도록 하자는 의미에서 글을 쓰게 된 것이다.)

3. 몸과 다이어트

이전부터 몸은 사회 계급을 드러내는 용도로 쓰였다.

과거 대를 잇는 것을 중요시 여기며 풍족하게 살지 못했던 때에는 풍만한 몸매가 부의 상징이자 미적 몸매가 되었다.

북한만 해도 마른 몸매보단 풍만한 몸매가 성적 어필이 더 잘된다 하질 않는가.

반대로 고대 그리스 귀족 문화에서의 다이어트는 자아 발달을 위한 도구로 간주하였다. 그렇기에 단식과 금욕주의는 귀족과 성직자 등 소수에게 제한되었고 이를 '선택 받았다'고 여겼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부르주아 계층이 탄생되기 시작되면서 몸 관리가 중산층의 관심사가 되기 시작되었다.

 

19세기에 부르주아의 상징은 불거진 배였으며, 이를 괄시하던 귀족 계층들은 우아하게 호리호리한 몸을 가지도록 하였다.

산업화 이후로 여성들이 사회에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길었던 하의는 짧아지기 시작하였고 자연스럽게 미적 기준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게 되었다. 

현대에 와서는 몸은 '개발'의 대상이 되기 시작하였다. 

물질적 부를 축적하는 것 뿐만 아니라 인간의 노동과 자원 조절, 관리하는 것이 능력으로 평가되는 사회가 되었다.

과도한 체중과 비만은 개인적 무능력과 빈약한 의지력 그리고 게으름과 관리 능력 부족으로 여기게 되었다.

반대로 경제적 여유가 있는 계층들은 헬스, 요가, 성형, 건강한 음식 소비 등을 통한 관리를 한다.

여기서 또 한번, 이런 몸적 변화가 여성과 남성 모두 똑같은 영향을 주었을까?

답은 절대 아니다.

코르셋의 탄생 계기는 여성의 활력을 감소시켜 일에 부적합한 몸으로 만들기 위함으로 탄생되었다.

역사상 여성 권리의 회복 운동이 고개를 들 때마다 반복된 여성 육체성, 육체를 통제하였다.

미국에서 페미니즘 제 2물결이 일어났던 5-60년대, 여성의 미의 이상형은 마릴린 먼로와 같은 육화된 여성성을 의미 했다.

현대 와서 깡마른 몸매가 미의 기준이 된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코르셋과 동일하다. '여성의 행동을 제약'하기 위해서다.

미적 목적으로 다이어트를 혹독하게 해본 사람들은 알것이다.

무리하게 40대까지 다이어트를 했을 때, 어떻게 관리를 하든 체질이 아닌 이상 살이 다시 돌아오는것을 많이 경험했을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요구하는 마른 몸매는 체질이 아닌 이상 여성에게 있어서 자연스러운 몸의 범주에서 벗어나게 된다.(마른 체질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에 부담이 될 정도로의 다이어트로 인한 몸은 부자연스럽다는 뜻)

코르셋을 쥐면 혈색이 창백해지고 휘청거리며 생활에 제약이 있었던 것 처럼,

현대 사회에서 여성 또한 사회에 진출하되 남성보다는 못한 존재로, 남성보다는 덜 활동적이게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코르셋이 바로 이 깡마른 몸매와 다이어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활동 제약을 불러일으키는 무리한 다이어트와 몸매가 아닌 우리가 남성들 못지 않은 사회 활동을 위한 나에게 맞는 건강한 몸이다.

4. 브라자

최근 한국 여자 연예인인 설리와 화사의 노브라 패션이 큰 이슈로 부흥되었다.

브라자는 무엇을 의미할까? 브라자는 작은 코르셋이다.

브라자를 입으면 여성들은 굉장히 답답해 하며 소화장애와 다양한 피부질환을 일으킨다.

나는 탈브라를 하게 된지 약 3년 되었다. 나는 언젠가 부터 극심한 습관성 소화불량 장애를 겪었다. 다양한 병원에 들려보았으며 대학병원에서도 원인을 찾지 못했던 불치병이었다.

그러나 어느날 우연의 기회로 노브라인 상태에서 며칠 활동을 하게 되었고 브라자를 착용하기 전보다 훨씬 편안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탈브라를 통해 나는 대학병원에서도 원인을 모르던 불치병을 완치시켜줬다.

여성학적 관점과 성교육적 관점에서 브라자는 생필품이 아닌 코르셋이다.

코르셋의 시작은 콤플렉스 증후근이다. 쳐지지 않은 예쁜 가슴을 사회 미적 기준으로 삼아 이에 부합되는 가슴을 찬양하고, 반대되는 가슴은 콤플렉스가 된다. 

이를 잡아주는 것이 브라자다.

 

브라자는 오히려 건강을 헤친다. 가슴을 받쳐주는 근육을 약하게 하여 오히려 장기간 착용을 하게 되면 가슴이 쳐지게 되고, 소화불량 장애, 땀이 차게 되면서 생겨나는 여러 피부 질환 등을 유발시킨다.

또, 여성이 가슴이 쳐지게 되는 원인 1순위는 노브라가 아닌 출산 때문이다.

여성이 임신을 하게 되면 유룬이 커지며 유선이 붓게 된다. 이 유선에 모유가 쌓이게 된다. 그래서 유선이 막히게 되면 젖몸살이 오는거고 모유가 나오지 않게 되는 것이다.

모유가 빠지면 유선은 바람빠진 풍선이 되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출산을 하게 되면 가슴이 쳐지게 된다.

또한 가슴이 쳐지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노화이다. 

늙어짐에 따라 피부가 얇아지고 유선을 받쳐주는 근육이 약해져 자연스레 가슴이 쳐지게 되는 것이다.

가슴이 쳐지는 것은 굉장히 못난 여성으로 취급하여 브라자를 강요하는 것 또한 '세뇌'이다.

 이런 세뇌를 하게 된 것일까?

간단하다. 여성의 행동제약에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코르셋의 탄생 배경에 있어 여성의 활동을 제약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하지 않았는가?

물론 남성과 사회가 만들어난 미적 기준에 부합된 예쁜 가슴을 위해 여성을 후려치려는 목적 또한 존재한다. 

브라자는 악세서리다. 설리가 말한 것 처럼 브라는 내 몸을 꾸며주는 악세서리일 뿐이다. 브라가 몸에 건강하다고? 가슴이 쳐지지 않게 도와준다고?

아니, 브라는 그저 옷을 입었을 때 예쁜 가슴 모양을 잡아주기 위한 악세서리일 뿐이다.

여자의 꼭지가 불편하다는 남성들은 자신의 꼭지는 불편하지 않는가?

여성의 가슴은 성적 어필이고, 그 가슴을 드러내는 것이 부끄럽다는 생각은 사회가 만들어낸 인식일 뿐이다.

5. 제모

노출의 계절인 여름이 다가왔다. 지금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도 현재 제모를 한 상태일까.

제모의 코르셋 맥락은 백래시와 함께 상업적 목적을 드러낸다.

 

1차 세계 대전 이후 제1 여성 해방 물결과 함께 엄청난 백래시가 나타났다.

4번 몸 파트에서 이야기 한 대로, 여성의 몸을 죄었던 길고 거추장스러운 드레스 대신 짧고 간편한 옷들이 등장하자 여성지 칼럼니스트들은 겨드랑이와 팔뚝의 털을 면도해야 한다고 권하기 시작했다.

또한 제모제, 면도기 사업에서 남성의 수염 면도만으로는 면도기의 돈이되지 않자

이러한 백래시와 함께 면도기 사업을 키우기 위한 대대적인 미디어 사업이 시작되었다.

제모를 한 여성의 몸은 매끄럽고 아름다우며 진정한 여성의 모습이라는 듯한 이미지를 소비하며 제모를 한 여성이 자연스럽고 여성스럽다는 인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비록 이전에는 여성에게 털이 있는게 매우 자연스러웠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와 함께 당시 미국의 화장품 업체들은 '여성과 위생'을 내세우는 광고를 통해 겨드랑이털이 여성의 건강을 위헙하는 병균취급을 하기 시작했다.

현대 와서는 남성 또한 몸을 제모를 하는 것이 예의로 여겨지고 있다.

몇몇의 여성들은 이성을 볼 때 콧 수염 자국이 있는지 없는지, 다리 털을 관리 하는지 안하는지를 본다.

그렇다면 남성에게 있어 제모는 '코르셋'일까?

정답은 남성들의 제모는 코르셋이 아닌 '자기 관리'이다.

남성들이 제모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남성답지 못한다고 욕을 먹는가?

그저 더럽다, 보기 흉하다고 욕할 뿐이다.

오히려 털이 많지 않은 남성들을 남성답지 못함을 상징하며 동성애자라는 편견의 낙인을 찍고, 몸 털 제모를 할 시 바짝 깎지 않고 적당히 숫을 치거나 정리를 한다.

반면에 여성들은 겨드랑이, 팔, 다리를 제모하지 않고 맨몸을 드러내면 여자 답지 못하다며 욕을 한다.

남성들에게 있어 제모는 선택의 문제이지만 여성에게 있어 제모를 하지 않는다면 밖에 나가는 것 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이렇듯 같은 제모라도 역사적, 사회적 맥락 속에 남성에게는 코르셋이 아니게 되고 여성에게는 코르셋이 된다.

6. 탈코르셋 운동

이 수 많은 코르셋의 역사를 보며 어떤 생각이 드는가?

꼭 탈코르셋을 해야 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는가? 탈코를 하지 못한 페미니스트는 진정한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생각 되는가?

이 글을 쓰는 나도 코르셋을 모두 버리지 못했다. 아직 긴 머리이며, 사람들을 만나야 할 때 화장을 한다. 남초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했다는 변명은 하지 않겠다.

나는 분명히 '사람이 아닌 여성으로서 남성으로부터 평가당할 수 있는 코르셋'를 버리지 못한 상태다.

그렇지만 나와 같은 이런 이들을 코르셋에 대한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보며 진정한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는 평가를 할 수 있을까?

여성에게 코르셋을 쥘 수 밖에 없는 역사적, 사회적 환경과 남성들의 헤게모니적 매커니즘이 잘 못 된 것이지,

사회에 살아남기 위해 코르셋을 버리지 못한 우리 자매들에게는 죄가 없다.

 

코르셋을 버리지 못하고 풀메를 하며 치마를 버리지 못한 채 주채적 꾸밈을 하는 자매들은 사회적 미적 기준을 자신의 자유라고 믿게 한 미디어의 세뇌와, 이 세뇌의 악습을 반복시키는 데에 죄가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탈코르셋 운동은 대한민국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엄청난 의미를 갖는 운동이라 생각된다.

 

탈 코르셋 운동은 '퍼포먼스'적인 의미가 강하다고 생각된다.

페미니즘 물결이 일어나고 여성들의 인식이 향상될 때마다 항상 백래시가 이뤄졌고,

코르셋을 안타깝게 여긴 코코 샤넬이 '자유, 해방'이라는 주제로 또 다른 코르셋을 만들어 낸 것 처럼,

우리는 항상 '패션'이라는 명목 아래에 또 다른, 다양한 코르셋들이 탄생했었고 우리는 이 코르셋을 자신의 의지라 믿으며 주워 입었다.

탈 코르셋은 이러한 사회적 미적 기준을 모두 버리고 정말 나의 기준대로 살겠다라는 퍼포먼스적인 운동이다.

탈 코르셋을 한 사람들은 멋을 부리지 않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편하지만 멋을 부릴 수 있는 아이템들은 굉장히 많다.

 


남성들은 기본적으로 탈 코르셋을 한 상황인데 이들이 멋을 부리지 않는가? 이들도 좋아하는 사람 앞에선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한다. 

탈 코르셋 운동은 사회가, 미디어가, 남성이 강요하며 세뇌시킨 미적 기준이 아닌 여성인, 사람인 우리의 기준대로 멋을 부리며 살겠다는 운동이다.

역사적으로 반복되어 왔던 코르셋으로부터의 여성 억압을 벗어 던지고 새로운 사회를 열겠다는 우리의 의지를 보여주는 운동이다.

그러나 자연 세계에서 도태란 필연적이기 때문에 나는 인간이 자신을 미적 활동을 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유명한 사회학자 아서 단토와 미셀 푸코에게 있어서 인간에게 있어 미적 활동은 중요하게 여겼다. 이는 단지 외모 뿐만 아니라 외모를 통해 드러나는 인격과 가치관 떄문이라 한다.

자기 자신을 가꾸는 것이 인간이 살아감에 있어 존재의 미학이라 주장했다.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스스로 살피고 그에 맞춰 나를 가꾸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즉, 사회가 요구하는 미적 기준에 나를 억지로 맞추며 괴롭히는 것이 인간에게 있어 미적 활동이 아닌,

나 자신을 알도록 하고 그에 따라 나를 가꾸며 가장 나 답게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 살아감에 있어 미적 활동이라는 것이다.

 

 

 

2015년 대한민국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코르셋 담론의 시기도 매우 적절하였다.

2015년 메갈리아의 탄생과 동시에 페미니즘에 눈을 뜬 몇몇의 사람들은 알 것이다.

이 리부트 이후로 얼마나 거센 백래시가 나타났었는지.

 

이 백래시에 페미니즘이 잡아먹히기 전 아주 적절한 시기에 코르셋 담론이 탄생했고

지금까지 이들은 전방에서 백래시와 남성들의 헤게모니 패권주의 네트워크와 미소지니에 대항하고 있다.

페미니즘의 궁극적인 목표는 여성의 인권이 남성과 동등해지는 것이 아닌 새로운 사회적 패러다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우리의 몸을 소중히 하며 미디어에서 세뇌시키는 미적 기준이 아닌 나에게 맞는 기준을 세워 나를 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여성들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힘을 합쳐 쟁취해나가자.

 



 

* 불펌 환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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